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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건설

앞산 용두골을 도둑질한 태영건설의 현장 파동 용두골 앞산터널 현장에서 나온 사토와 암석을 시공사인 태영건설이 특정업체에 넘겨준다는 소식을 접하고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뒷거래 의혹은 물론이요 감독기관의 묵인 없이는 어려운 일임은 두 말 하면 잔소리죠. 암석이 발견되면 감독기관에 보고하고 현장에서 활용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태영건설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공사중지 명령을 받고도 불법 공사를 자행하는 간 큰 짓을 하더니 이젠 특이한 암석 밀반출까지 서슴지 않다가 누군가의 제보로 들통 나 현재 작업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감독 기관인 대구시종합건설본부의 책임은 물론이려니와 이 사건과 얽힌 태영건설 관계자들을 문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앞산꼭지들이 앞산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과 용두골을 지켜온 농성장은 현장 밖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앞산꼭지들.. 더보기
갑자기 제안한 앞산 투쟁 활동평가에 대해 기습작전 같은 당황스러운 평가제안 앞산꼭지 모임에서 회의를 통해 ‘활동평가’를 제안해도 될 것을 사전에 한 마디 말도 없이 올라온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해 적당한 시간을 두고 결정해야 할 일을 급히 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기습작전처럼 말이죠. 상황실 회의 때 문건을 통해 처음 안 ‘앞산네트워크’는 이미 외부에서 알고 있더군요. 추운 겨울 자칫하면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을 같이 보내고, 용역깡패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벌목 저지 싸움까지 같이 한 동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바로 글을 올리려 했으나 감정이 너무 실릴 것 같아 자제하느라 몇 일 미루었습니다. 제가 소속한 진보신당 게시판에도 ‘활동평가 제안’이 올라와 .. 더보기
‘앞산’이던 뭐든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말라고? ‘비판에 성역은 없다’고 믿기에 아무리 대안이 없다 할지라도 원칙을 갖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비판하라’고 감히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오래도록 유행하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대안 없는 비판 무용론’인데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함부로 사용했죠. 거꾸로 말하면 ‘제대로 된 대안이 없으면 비판을 하지 말고 입 다물어라’는 말이지요. 목숨을 걸고 천성산터널 반대한 지율이란 승려는 ‘대안이 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난 대안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원칙에 어긋난 것에 대한 저항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명쾌한 말입니다. 숨어 있는 ‘제대로 된 것’이라는 수식어가 매우 중요한데 비판받는 쪽은 어떤 대안을 제시해도 ‘제대로 된 대안’이라고 받아들일 생각이 없지요. 비판의 목적이 대안 제시가 아.. 더보기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앞산을 지키는 사람들. ‘지금의 남의 땅’ 건설자본에게 빼앗긴 앞산의 숲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전 대학에 군인들이 주둔하던 시절 이 시는 불온한 것이라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교정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숨 졸이며 막걸리 마시다 울분을 터뜨리던 기억이 난다. 대구 성 안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갔다 와 수성들 신천변에 있는 교남학교(대륜중고)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수성들을 지겹도록 밟아야 할 정도로 땅 많은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마돈나 나의 침실로’라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보듯, 식민지 땅의 먹물들 처럼 허구한 날 기생집 들락거리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큰 형님을 만나고 와서 이 시를 .. 더보기
건설자본의 탐욕이 파괴하는 앞산의 계곡 아침 일찍 일어나 오랜만에 달비골을 산책하고 오려는데 대형 덤프트럭이 흙을 붓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터널 공사 굴착은 커녕 아직 시작도 안 되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가슴을 달래며 가까이 다가갔다. 파헤친 숲의 흙이 장마철에 밀려 내려올 것에 대비한 배수로 작업을 위한 토공작업 중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다듬어진 달비골 계곡의 보기 좋은 크고 작은 바위조차 건설자본의 눈에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제거 대상’일 뿐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장마에 폭우가 쏟아져도 도랑에 물만 잘 빠지면 되지 자연이 그냥 다듬어 인간에게 안겨준 흔적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달비골 계곡의 아름다운 바위조차 묻어 버리고 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또 속이 상한다. 나도 자연을 파괴하고 콘크리트 구조물.. 더보기
비 내리는 앞산에서 꾸는 발칙한 꿈 ▲ 앞산꼭지들의 작은 성인 18미터 높이의 ‘나무 위 농성장’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썰렁했던 겨울과 달리 이미 녹음으로 우거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긴 했으나 가뭄 해갈은 커녕 땅을 적시다 말았다. 강원도는 눈이 내려 차량이 거북이 운행을 할 정도였다는데 같은 한반도 남녘땅에 왜 이리도 불공평한지 모를 일이다. 한심한당의 텃밭인 대구는 정녕 버려진 땅인지 헷갈리기만 한다. 정말 하느님 원망만 떠오른다. 일요일 밤 당번이라 농성장을 지키는데 비가 많이 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농성장 천막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체감 온도까지 떨어져 몸에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전열기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날씨가 풀렸다고 천막 지붕 쪽의 막은 것을 털어 놓았는데 솔솔 새는 찬바람이 제법 몸을 움츠려 들게 한다. 비가 그치.. 더보기
‘지금은 남의 땅’ 앞산에 늘린 조상들의 흔적 파동의 앞산터널 직접 피해지역에 사는 주민 한 분으로부터 ‘중요한 문화재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른 날도 아닌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쓴 4.19에 앞산꼭지들은 일촌계를 빨리 끝내고 파동으로 갔습니다. 주택가는 전쟁터 마냥 참혹하기 그지없었으나 용두골의 봄은 활짝 펴 봄내음을 가득내고 있더군요. 앞산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읊었듯이 물먹는 하마처럼 돈 먹는데 혈안이 된 건설자본이 권력과 짜고 치는 ‘민자사업’이란 이름으로 사정없이 파괴하는 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그래도 봄이 와 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자연 광경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그저 주신 고귀한 선물인 자연 속에 남아 있는 조상들의 숨결을 .. 더보기
파괴되어가는 앞산의 ‘천국으로 가는 문’ 용두골 얼마나 아름답기에 매일 용두골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이 ‘천국으로 가는 문’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경치가 좋은지 가 보면 누구나 다 아는 곳입니다. 앞산터널 공사를 한답시고 고가도로가 지나는 아래 지역을 철거하려고 에워싸 놓았더군요. 동네는 마치 전쟁 터 마냥 스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혁명 기념일에 무참하게 파괴되어 가는 파동과 용두골을 둘러 본 앞산꼭지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습니다. 역사 교과서를 새로 쓰야 할 정도로 소중한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공사중지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시의 묵인 하에 민자유치사업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건설자본은 ‘황금 알’ 낳는 장사를 해대고 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조상도 몰라보는 무리들에게 천벌이 내리리라 믿습니다. 더보기
앞산을 지키던 어느 날 밤과 아침 어제 당번이라 농성장을 지켰습니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정보과 형사가 나타나 특유의 능글능글한 말투로 헛소리 하는데 구역질이 나서 참느라 혼났습니다. 아직도 정보과 형사의 요시찰 대상인 걸 보니 앞산꼭지들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인사를 하지만 퉁명스럽게 쏘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마디 해 봐야 소설(보고서) 쓰는데 이용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금처럼 직접 부딪칠 경우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게 지금까지의 경험입니다. 낮에는 초여름 날씨라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밤이 되자 골 들머리 특유의 찬바람이 불어 닥치더군요. 추위에 떨지 않으려니 어쩔 수 없이 온풍기를 돌렸습니다. 전자파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니 .. 더보기
앞산에서 떠 올리는 부활의 의미 ▲ 건설자본과 권력이 야합해 파괴한 앞산 달비골의 숲,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이 낳은 재앙이 온다는 것을 모르는 멍청한 짓이다. 이번 일요일은 죽어서 무덤에 묻힌 예수가 살아났다는 부활절이었습니다. 팔레스틴 촌놈으로 태어나 남들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던 별종이요, 철저히 왕따를 당한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무덤을 덮고 있던 돌이 파헤쳐져 있어 죽지 않고 부활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나 성서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부활신화’로 표현하며 ‘부활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믿고 소중히 여기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보면 그야말로 완전히 ‘날나리 신앙’이라며 기절초풍할 일임에 분명하자 이는 사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