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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갑자기 제안한 앞산 투쟁 활동평가에 대해

 

기습작전 같은 당황스러운 평가제안


앞산꼭지 모임에서 회의를 통해 ‘활동평가’를 제안해도 될 것을 사전에 한 마디 말도 없이 올라온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해 적당한 시간을 두고 결정해야 할 일을 급히 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기습작전처럼 말이죠. 상황실 회의 때 문건을 통해 처음 안 ‘앞산네트워크’는 이미 외부에서 알고 있더군요. 추운 겨울 자칫하면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을 같이 보내고, 용역깡패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벌목 저지 싸움까지 같이 한 동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바로 글을 올리려 했으나 감정이 너무 실릴 것 같아 자제하느라 몇 일 미루었습니다.


제가 소속한 진보신당 게시판에도 ‘활동평가 제안’이 올라와 있어 회의를 통한 결정처럼 보여 경위를 묻는 당원들에게 뭐라 답변해야 할지 모르는 저로서는 매우 언짢았습니다.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기습작전처럼 느껴졌다면 지나친 과민 반응일까요? 내부 평가를 하려면 최소한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건만 제안자들은 그것조차 무시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비록 싸움에 지더라도 사람이라도 챙기자’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의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의나 평가ㆍ투쟁 전술은 누구나 제안할 수 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대구은행 앞 시위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대구은행 앞 시위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한 번이라도 본점 영업부를 마비시키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지들이 하기에 휴식을 취하고 체력 보강을 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했습니다. ‘시민들이 불편해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앞산꼭지도 있었으나 ‘창구를 마비시킬 때 최소한 전무나 상무가 나와 대화하자고 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한 번의 위력은 두 세번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상대는 긴장하기 마련이죠. 모든 면에서 열세인 우리가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려면 가장 약한 급소를 사정없이 가격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며, 그로 인한 비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수 차례 ‘한 번이라도 집중해서 하자’고 제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답변을 듣지 못했고, 실행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 몰라라 하지 않은 것은 동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향후 우리들의 방향전환과 내용 변화와 관련한 ‘앞산터널 반대 투쟁의 전환을 제안하며’라는 문건의 내용은 상황실 회의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 돌았으니 어이가 없더군요. 좀 까칠하게 말하면 ‘보안유출’이라 봅니다. 개인 결사인 앞산꼭지 모임의 특성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을 뿐 다른 조직이었다면 묵과하지 않고 냉혹한 비판을 했을 겁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발전 한다’는 철학의 기본 명제처럼 상황은 수시로 변하고 어떤 형태로던 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앞산꼭지들은 없다고 봅니다.


앞산네트워크는 ‘앞산꼭지의 해체도 포함한다’고 한 것은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사람에게는 폭력입니다. 회의 도중 불편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어느 꼭지의 견해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게 동지에 대한 예의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지요. 말이 발전적인 해체이지 해체는 곧 퇴각을 말합니다. 냉정히 묻는데 지금이 퇴각의 시기인가요?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나무 위 농성과 벌목 저지 과정에 대한 기록조차 남기지 않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퇴각이란 말은 모든 성과를 공중분해 시키고 맙니다. 업무 방해로 고소당한 6명에 대한 벌금 처리 문제도 정리하지 않고 퇴각해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싸우겠다는 사람이 있는 한 해체는 안 된다.


지금까지 대구지역에서 살아왔고 이런저런 투쟁의 현장에서 얼굴 팔린 늙다리가 자기 벌금 문제는 물고 늘어져 놓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후배들의 벌금 처리도 하지 않고 빠져 나온다면 어느 누가 사람 취급 하겠습니까? 우린 깨질 줄 알고 달려든 싸움에서 깨진 것이니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제안한 ‘앞산연대’가 어떤 내용을 담을지 문건을 아무리 검토해도 ‘해체’하는 말 외는 가슴에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해체와 퇴각이 중요하고,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면 당연히 해야겠지만 밀린 게 많은 지금은 분명 그 시기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남아서 아닌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첫 농성자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해체하고 퇴각하자’는 것은 분명 폭력입니다. 모든 투쟁은 뛰어들 시기와 퇴각의 시기가 아주 중요하죠. 지금 우리가 ‘나무 위 농성’ 시작 시기를 잘못 선택했고 2~3안도 없이 준비 없이 뛰어든 것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지만 퇴각할 시기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간곡히 부탁하건데 내부에서 조차 거론하지 않은 내용이 외부에 미리 새는 ‘보안사고’가 없도록 각별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얼굴에 침 뱉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제안서나 평가 문건을 써 본지 너무 오래되어 이렇게 쓴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