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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앞산에서 설날 아침에 형님 두 분을 떠 올립니다.


 

사용ㆍ광용 형님, 두 분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었군요.

그 동안 하늘나라에서 편히 잘 쉬고 계시는지요? 게을러터진 인간인지라 형님들 묘소에 성묘조차 제대로 못 하며 인간 구실 못하고 사는 동생을 나무라주십시오. 저는 이번 설에 제사도 같이 지내지 않고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입산을 했습니다. 전형적인 정경유착인 민자유치사업으로 대구의 심장부인 앞산을 파헤치려는 미치광이 짓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벌목 작업을 막기 위해 나무 위에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셈이지요. 여기를 ‘대구시립기도원’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 한겨레신문 사진부 김태형 기자가 취재 후 보도로 나간 사진이라고 보내주었습니다. 파일이 워낙 커서 일부 잘라서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전 서성로 깡통 골목에 점포 세 개나 갖고 있는 부자 집에 일류대학에 대학원까지 나와 온 집안의 조명을 받았던 광용이 형님. 형님은 우리 집안의 기대를 온 몸에 받았지요. 대학생이 가물에 콩 나듯 하던 시절에 일류대학을 다닌지라 유신시절 형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정세 분석과 판단이 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지요. 그런 형님이 마흔도 못 되어 착하디착한 아내와 사랑스런 딸 보라와 정민이를 남겨 둔 채로 돌아올 수 없는 나라가 가셨지요. 그 때 저는 집과 연락이 닿지 않아 형님 소식을 나중에야 전해 듣는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형이 죽었는데 안 보이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형수는 나중에 제 이야기를 듣고 오해를 풀었지요. 성질이 괄괄하다 못해 포악하기 그지없는 욕심꾸러기 아버지 밑에서 자라 형님의 마음고생이 많으셨지요? 성질난다고 며느리 보는 날 손님들 앞에서 고함지르는 것도 불사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그런 불같은 큰 분도 아버지가 ‘형님, 이 좋은 날 그렇게 하시면 되느냐’고 하면 수그러졌으니 아무리 동생이지만 어려워 하셨던 것 같습니다.

1987년 말 형님이 근무하던 민정당사회문제연구소 배성동 소장이 선거를 앞두고 사전 정지 작업하러 와서 석용이(동생)에게 ‘네 친구들 모아 선거 운동 좀 해 달라’고 했다가 바로 거절당하셨지요. 동생은 대학 입학하고 나서 수시로 쇠파이프를 들고 시위 현장을 누볐고, 야학을 계속해 왔다는 걸 모른 형님이 실수 하신 거죠.
먹물 먹은 형이 ‘군사독재정권에 영혼을 판다’고 생각하는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 때 석용이는 ‘형님, 이런 전화는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10년 넘게 나이차는 동생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마음 상했을 형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떠 올려봅니다. 어려운 작은 집 형편에 돈 준다면 덥석 물줄 알았는데 고집을 부렸으니 황당하기도 했을 겁니다. 어리게만 알고 있었던 동생으로부터 거절당한 형님의 상처도 컸을 겁니다. 그 시절 박사학위만 있었다면 대학 교수 자리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는데 워낙 막힌 큰아버지가 뒷받침을 해 주지 않아 형님의 꿈도 무너졌으니 속도 많이 상하셨지요. 그래도 그렇지 어쩌다 군사독재 정권에 지식을 팔게 되었는지 형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형님은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제가 군대 가 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차비도 얻을 겸 찾아 가서 부고를 전했을 때 형수는 눈치를 보고 있는데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보 동생 차비 좀 주라’면서 저 혼자 그냥 보냈지요. 돌아서서 나오는 순간부터 대구 도착할 때 까지 이를 악물며 피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죽으면 조문을 가건만 할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왜 그렇게 처신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저는 ‘윤광용이 너 한테 이 원수는 꼭 갚겠다.’고 수 없이 다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실 대로 말씀 드렸다가는 집안이 발칵 뒤집어 질 것 같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냥 넘겼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버지에게는 그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고 동생인 석용이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 동생에게 ‘군사독재정권 선거운동’하라고 했으니 난리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죠. 그런 형님이 너무 미워 저는 분노를 쌓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형수가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다면 철천지원수로 남았을 텐데, 그 어려운 신혼살림에도 불구하고 외박 나가면 시동생 돈 없다고 목욕비에 차비까지 챙겨준 그 사랑을 잊지 못하겠더군요. 보라와 정민도 저를 잘 따라 주기도 했고요. 벌써 서른이 된 정민이는 ‘삼촌 얼굴만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라고 하니 저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더군요. 양심은 속일 수 없었는지 연일 술로 살았다는 말을 형수로부터 들었습니다.


첫 성묘 때 분노와 슬픔이 교차해 참 많이 울었습니다. 살아 있다면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할 텐데 죽은 사람에게 달리할 게 없었으니 말이죠. 사람이 떠날 때를 아는지 형님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그 전과 달리 겸손해지셨지요. 증조부 때부터 백부까지 3대에 걸친 두 집 살림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형님 역할이 중요했는데 그만 요단강 넘어가 버렸으니..... 형님이 세상 떠나자 큰아버지는 명일동의 아파트만 남겨 놓고 형님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다 가져가 버렸고, 계집애라고 손녀들 학비 한 푼 안 보냈으니 형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형수가 갑자기 쓰러져 입원하기 힘들다는 삼성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모든 검사를 받아도 원인불명이라 고생이 더 많았지요. 여린 사람이 남들에게 풀지 못하고 쌓아온 마음의 병이라 오래도록 치료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밉고 철천지원수 같던 형님이 세상을 떠났건만 용서하기까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수양이 부족한 제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미움과 분노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내 짐이 너무 무겁고,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어 용서할 수 밖에 없더군요. 무엇보다 형수와 사랑스런 보라ㆍ정민이가 자꾸만 눈에 밟혀 용서하고 나니 제가 편해졌습니다. 저도 이제 오십인데 마흔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난 형님,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하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지 않는 형님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형수와 질녀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형님이 야속하기 그지없네요.


백부께서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 고생만 하고 살아오신 사용 형님.

우리 집안 장손이라고 할머니가 무척 귀여워 하셨지요. 형수가 시집와 할머니께 인사드릴 때 ‘우리 손부 참 곱다’면서 두 손을 꼭 잡아 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명절이면 큰 집에서 제사 지내자마자 어린 조카들 데리고 바로 인사드리러 오느라 형수 고생이 참 많았지요. 방앗간은 백부님이 세상을 떠나자 욕심 많은 서성로 큰 집에서 가져가 버렸고, 명절이면 어른이란 양반들이 칭찬이라곤 한 마디 없이 잔소리만 늘어놓아 속도 많이 상하셨지요? 다행히 아버지는 ‘애비 없는 불쌍한 조카들’이라며 걱정하고 수시로 농번기 때는 찾아가곤 하시는 걸 제 눈으로 여러 번 봤습니다.


전경환이가 소 파동으로 장난질 쳐 있는 재산 날려 버리고, 돈 좀 벌어 보겠다고 뛰어든 특수작물 농사 몇 번 실패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형님이 술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비빌 언덕이 있어야 뭐라도 해 볼 텐데 사방이 절벽인데 무슨 용기가 나겠습니까? 형님이 간경화로 고생한다는 것을 시사 때 가서 안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애를 쓰셨는데,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형님이 술을 끊지 못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야 마셨지요. 형님 장례치를 때 젊은 조카의 죽음을 보고 피눈물을 삼키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그렇게 슬프게 우시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둘째 고모는 ‘늙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왜 젊은 놈이 죽느냐’며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형님이나 광용이 형님 두 분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두 분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교회에서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장난치기 좋아하고, 싱겁기 그지없던 인간이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눈빛이 달라진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청년시절 그런 저를 보고 어설픈 교회 전도사가 ‘원수를 용서하면 안 되느냐’기에 “멀쩡하던 우리 집이 철거당해 폭삭 망하고, 종형 두 분이 죽었는데 너 같으면 용서란 말이 나오느냐?”며 “용서란 말 함부로 하지마라. 가해자인 전두환ㆍ노태우가 고개 쳐들고 사는데 어떻게 용서 한단 말이냐?”고 했더니 아무 소리 안 하더군요. 남의 일이라고 용서의 전제 조건조차 알려하지 않더군요.


일생을 몸으로 일구어 온 부모님들의 재산을 ‘강제철거’로 폭삭 내려앉혀 버린 전두환이를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던 형님을 망하게 해 알콜 중독자로 만들었으니 더 용서할 수 없지요. 저는 지금도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보다 철거현장에 가면 가슴이 두근거려 주체할 수 없을 때가 많답니다. 강제철거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이리도 크고 오래갈 줄 몰랐습니다. 제가 이럴 진데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실지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저라도 잘 살아야 형수들과 조카들을 좀 챙길 텐데 몇 번 풍파를 겪고 나니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워 마음뿐이라 죄송합니다. 일찍 혼자되어 고생하는 질부들과 종손녀ㆍ종손자 걱정을 아버지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수시로 하십니다. 대봉동에서 철거만 당하지 않았어도 ‘고생한다’며 질부들과 종손녀들을 챙겨 주실 어른이 그러지 못하니 더 속이 상하지요.


제가 이번 설에는 앞산을 지키러 달비골에 입산해 있어 찾아뵙지 못해 두 분께 죄송합니다.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아닌 것을 아니다’고 말할 용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부모님들에게는 다른 핑계를 대고 이 곳 상수리나무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누구 말처럼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싸우고 있습니다. 골바람이 세찰 때는 형님들 생각이 가끔 나곤합니다. 두 분이 누워 계신 곳에도 북풍한설 칼바람이 몰아칠 텐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형수들이  ‘성묘 갈 생각조차 못한다’고 하시니 어느 정도 어려운지 아시겠지요. 대신 제가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에서나마 고생하는 형수들과 조카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두 분이 양지바른 곳에 누워 계시니 하늘나라에 가서나마 편히 쉬시라는 말씀 밖에 드릴 게 없어 죄송합니다.


                             기축년 설날 아침에 달비골에서 동생 희용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