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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청년시절 앞산에 얽힌 추억


 

20대 후반 청년시절, 앞산 고산골이 가까운 상동의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상동교가 개통되어 번화가가 되었지만 작은 시장이 있는 아담한 동네였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학생들을 꼬드겨 약수터까지 갔다 오곤 했습니다. 민중교회에 다녔으나 당시 분출하던 노동자들의 열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일반 교회로 옮겼습니다. 잡히면 바로 감옥 가던 시절, ‘군사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져 주말이면 온 거리에 최루가스는 자욱했습니다. 젊은 혈기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분노가 쌓이면 무작정 앞산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오르내리며 미운 놈 욕도 하면서 고함도 지르고, 철 따라 변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면서 ‘왜 우린 군사독재 정권에 시달려야 하느냐’는 원망도 했습니다.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의문사를 당한 장준하 선생님이 산을 좋아하신 이유를 조금씩 알 수 있었습니다. 산에 오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 심정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았던 것도 아닌 시절이라 평소 운동으로 단련한 몸만 믿고 등산화에 배낭 달랑 매고 무작정 갔습니다. 힘이 넘치면 뛰어 가기도 하고, 학생들과 같이 갈 때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달래가며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산에 올라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수성구가 개발되기 전이라 산에 오르면 콘크리트 덩어리가 가로막고 있는 지금과 달리 전망이 무척 좋았습니다. 이상화 선생께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느가’라며 직격탄을 날린 시상을 떠 올린 수성들을 가리키며, ‘마돈나 나의 침실로’라는 허무주의에 빠져 ‘기생집 들락거리던 사람이 확 달라진 사연’도 들려주곤 했습니다. 마침 이상화 선생님이 몸담았던 대륜고(교남학교)를 다닌 학생이 있어 ‘이상화 문학전’을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산을 다니고 ‘사노라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같은 노래를 같이 불렀던 10대들이 이젠 30대 중반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농구를 좋아해 체육교사가 된 친구도 있고, 목사가 되어 ‘선생님의 신학적 관점은 위험하다’며 훈수를 두는 친구도 있습니다. 바뀌지 않을 줄 알면서도 걱정하며 건네는 그 말에 ‘신학적 근거가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면 구닥다리를 꺼내 ‘목사들이 그 모양이니 한국교회가 이 꼴’이라며 아픈 곳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공중에 떠버린 세대라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생하는 친구들도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교회에서 잠시 선생노릇을 했다고 ‘집사’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예전에 같이 뒹굴 때 생각나는 것 없느냐”고 물으면 “꼬임에 넘어가 산에 간 것과 몸으로 부대끼며 같이 장난친 것”을 떠 올리더군요. 아무리 책 많이 보고 가서 좋은 이야기 했던 것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린 자신들과 같이 한 것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머리로 배운 것은 금방 사라지지만 몸으로 체득한 것은 오래간다’는 걸 깨닫게 하는지라 ‘잔 머리 굴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교회 가까이 산이 있어 갔을 뿐이고, 몇 번 가다 보니 재미가 붙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산이 가져다주는 매력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갈대를 꺾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기도 했고요. 그런 앞산을 파괴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독약은 약이 아니듯이 악법은 법이 아닙니다. 말썽 많은 ‘민자유치사업법’은 건설자본의 배를 채우고, 엄청난 뒷거래를 하는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추억마저 빼앗으려 합법이란 잣대를 갖다 대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연은 그대로 놔두기를 바라지 인간의 얄팍한 잔꾀를 원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