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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지금 예수가 앞산 달비골에 있다면?

 

생명 파괴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게 예수의 참 모습


예수가 지금 달비골에 있다면 적당히 싸우는 게 아니라 ‘지는 싸움 하는 바보’라는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다. 장비 앞에 드러누우며 ‘대구의 허파를 파괴하지 마라’며 몸부림 칠 것이다. 경찰과 용역 깡패들과 대화 하지 않고 ‘생명을 죽이는 미친 놈’이라며 뒹굴다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만든 자연을 건드리지 마라’며 죽어가는 생명들의 아픔에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이 여리면서도, ‘과격한 인간’이란 소리 듣는 것 겁내지 않고 싸운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생명 앞에 타협하지 않는 올 곧은 인물이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종교적 천국으로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선교나 전도로만, 기도를 종교적 간구로만 이해하는 건 본의 아니게 그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는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며, 기도는 ‘신념을 다지고 자기 성찰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지배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할 때 안전하다.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그 체제가 일정 부분 수용할 수 있다.


사실 그런 수용은 체제 유지를 위해 유익하다. 체제가 좀 더 근본적인 저항이나 위기를 맞는 상황을 미연에 막아 주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가 소외된 이민자나 민중들의 폭동을 바로 제압하지 않고 적당히 묵인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러나 아예 체제 자체를 부인해 버리며 전복하려 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득권자들은 개혁은 수용할 수 있어도 변혁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여 개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다시 세우려 했다. 예수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나아가 제거당할 위험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문서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소설책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교회는 그 ‘시점상의 혼란’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부추겨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 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 가기보다,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 위의 사진은 초등학교 때 찍은 것, 지금은 부쩍 자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아들 손우현 군과 바람이 세게 부는 날 상수리나무 위 ‘놀이기구’ 체험(?)을 빡시게 한 하외숙 꼭지 모자.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개 개신교는 중세 카톨릭의 타락에 대항한 종교개혁으로 만들어진 걸로 알려져 있다. 물론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의 좀 더 중요한 본질은 십자군 이후 봉건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왕과 귀족을 제치고 서서히 서양 세계의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난 도시 상인들, 즉 신흥자본가들이 왕과 귀족의 교회인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에 맞는 교회를 세운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사회 탄생’의 서막이다. 종교 개혁 세력이 토마스뮨쩌 같은 체제를 뒤흔든 농민 반란을 무시한 것을 보면 본질을 알 수 있다.


예수당시에도 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져졌다. 그러나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면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가 된다. 물론 누구도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대 놓고 말하진 않지만,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미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셈이다. 예수는 그 저주를 뒤집는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만연한 세상을 향해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한다.


예수는 치유 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는 건 물론이요 ‘하느님에게 감사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라며 이적 사건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적이란 ‘나와 하느님의 소통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예수의 태도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깨우침을 준다. 그 교회가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한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라고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쳤듯이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라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쳐야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밟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이다. 사실 그런 관점은 계급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한 오늘 세상에서도 일반적이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계급은 민중들로 하여금 세상을 계급으로 나누어 보지 못하게 하려,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뭉뚱그려 보게 하려 애쓴다.


▲ 지난 시절의 민주화 역사 향수에 빠지지 말고 독재를 휘두르는 이명박 정권에게 짱돌을 들고  새총을 거머쥐고 ‘저항하자’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은 불의 앞에 용감했던 예수의 삶이었다.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지 구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민족’, ‘위대한 로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따위로. 그래야만 그 민족이나 국가 안에서 계급간의 억압과 착취를 숨길 수 있다. 예수는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믿음’을 가지라고,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느님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교회에 나가거나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차원이 아니다. 교회나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 한 방식일 수는 있지만, 유일하거나 완전한 방식은 아니다.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교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불의 앞에 끝까지 저항한 예수의 삶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말이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팔레스틴 유대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끝까지 치열하게 저항하라는 것을 분명히 표현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예수가 말하는 저항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해석이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사랑과 용서의 사람, 비폭력주의자, 하느님의 아들 등등. 그런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 체제에 의해 사형 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은 예수가 ‘왜 사형 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고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저쪽에서 대접받으면서 ‘예수를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 건 사기다. 더구나 자연과 생명을 거래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이런 예수를 앞산 달비골에서 봤으면 좋겠다. (김규항의 예수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