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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민중

쌍용차 파업 노조원…“77일간 우린 인간이 아니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여전히 투병 중이다


“함께 살자고? 지금 이건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같이 살자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앞장서기는 싫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노-노 갈등이 아니라,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미친 것이다.”


지난 5일 경찰이 쌍용차 노동자에 대한 진압 작전을 벌이던 시간, 평택 공장 정문 밖에서 만난 박 모 씨의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노조의 파업 76일째, 일명 ‘산 자’인 그는 이날 정문 밖에 있는 진보신당을 비롯한 여러 연대 단체의 천막을 자기 손으로 때려 부쉈다.


“끝은 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고 힘들다. 이웃에 있는 옛날 동료들을 어떻게 웃으며 볼 수 있을까 싶다. 아무리 회사가 시켰다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새총으로 볼트를 날릴 수 있나.”


6일 평택공장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 앞, 77일의 옥쇄 파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 모 씨는 단지 입구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을 사 피우며 이렇게 말했다. 김 씨는 “두 번 다시 한 식구들과 전쟁터 같은 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해와 미안함이 서운함으로, 다시 분노로…증오하게 된 77일


77일의 노조의 파업은 끝났다. 노조의 파업이 끝난 뒤 7일 만인 13일 평택공장에서는 처음으로 74대의 완성차가 출시됐다. 쌍용차 측은 “20일부터는 모든 생산라인이 완전히 가동 돼 하루 300대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평택 공장은 노조 파업의 이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 같던 시간 동안 공장 안에서 사생결단의 각오로 싸웠던 노동자들도, 공장 밖에 있던 이들도 쉽게 회복될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3000여 명의 산 자와 976명의 죽은 자, 지난 77일은 이 두 집단의 사람들에게 점점 더 서로를 미워하게 됐던 날이었다.




처음에는 파업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던 산 자들도 노조의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변해갔다. 월급을 받지 못하는 날이 길어져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파업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향해 ‘파업을 그만두라’고 얘기하는 산 자들이 너무나도 서운했다. 공장 안과 밖에서 이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이해도 시간이 갈수록 서운함과 미움으로 바뀌었다. 회사는 이를 주도했고 경찰은 심리전의 일환인 ‘선무공작’으로 부추겼다. 지난 6월 16일 처음으로 회사가 산 자들을 동원해 일명 ‘출근투쟁’을 시도했다. 이를 시작으로 회사는 평택과 서울에서 여러 차례 ‘노조의 파업 중단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자발적인 것’이라는 회사 주장과 달리 관리자가 보낸 문자 등 강제 동원의 증거가 잇따라 나왔다. 결정적으로 6월 26일 회사가 2000명의 직원을 동원해 노조가 점거하고 있는 공장 안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비록 하루 만에 회사는 철수했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다친 후였다. 그리고 이날은 시작이었다. 합의 직전인 지난 5일 스스로 파업을 그만두고 도장공장에서 나온 이 모 씨는 “회사 직원과 용역 경비원이 우리에게 하는 모습을 보고 치가 떨렸다”며 “어떻게 한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고 말했다.


“산자가 죽은 자를 다시 참수하는 비극의 감독은 회사”


지난 6월 10일 회사가 연 노조 비난 결의대회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끝내 숨진 사십대 중반의 김모 씨는 어제까지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를 향해 비난을 퍼부어야하는 마음의 고통이 어떤 극단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문제는 이런 극단적인 갈등을 조장한 것은 회사였다는 것이다. 파업을 끝내고 만난 박기수 씨는 “솔직히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회사 아니었느냐”고 되물었다.




“경찰 진압 작전을 하던 날, 친구 놈이 하나 같이 나왔다. 나를 포함한 파업 노동자에게 새총을 날리고 있는 모습을 봤다. 충격이었다. 그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다 정리된 뒤 저녁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너 아직 도장공장에 있지? 아까는 미안했다’고. 그 친구가 무슨 죄가 있나. 뒤에서 미는 회사, 정부가 잘못한 거 아니냐.”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도 이런 극단적 노-노 갈등에 대해 “쌍용차는 산 자가 죽은 자의 묘지를 파헤쳐 그 시신을 다시 꺼내 참수하는 것과 같았다.”며 “각본과 감독은 사측이 했고 경찰과 용역은 주연 배우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협력업체가 조기 파산 신청을 들먹이고, 법정관리인들도 ‘청산형 회생계획안’을 운운하면서 산 자들의 노조에 대한 비난은 더 격해졌다.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는 비난의 겉모습은 ‘회사 걱정’이었지만 사실 속내는 ‘생계 걱정’이었다.


5일 평택공장 밖에서 만난 김양수(가명) 씨는 “이러다 나까지 잘리는 것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비해고자들을 흥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노조가 파업을 푼다고 하더라도, 장기 파업으로 회사가 정상화되지 못하면 다시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 수 밖에 없어 다들 마음을 많이 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희망퇴직을 신청하겠다’며 스스로 공장을 나갈 뜻을 밝히는 것은 이런 감정의 상처 탓이 크다는 증거다. 박기수 씨는 “설사 내가 운이 좋게 무급휴직자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휴직 후에 어떻게 공장 안에 복귀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그냥 퇴직할까 한다”고 말했다.


“헬기 소리 들리자 아이 손 놓고 도망”…심각한 후유장애


비단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쉽게 가시지 않을 섭섭함만이 아니다. 파업 참여 조합원들은 그토록 그리던 집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옥쇄 파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밤마다 악몽을 꿔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환청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으며, 제대로 된 밥을 먹어도 설사를 한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증언대회에서 가면과 모자 등으로 얼굴을 모두 가리고 나온 파업 참여 조합원들은 증상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다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조합원 C 씨는 “오늘 새벽에도 용역 경비들에게 맞다 도망치는 꿈을 꿨다.”며 “매일 악몽을 꾸다가 새벽 4시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대책위의 권지영 씨는 “남편이 환청에 시달리고 멀리서 헬기 소리나,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화들짝 놀래곤 한다.”며 “그런 남편을 보는 것이 참 절망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조합원 모 씨는 “며칠 전 가족과 외출을 했는데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리자 자기도 모르게 애들 손을 놔버리고 건물 안으로 도망가 숨었다”며 “창피하고 참담했다”고 털어놓았다.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증거다.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상처는 더 깊다. “지난 77일간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이들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편 가른’ 남편을 따라 갈라진 가족들…‘아직도 짐이 너무 많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가족대책위 활동을 하며 남편의 파업을 돕기 위해 물 불 안 가리고 뛰어다녔던 아내들도 참 많은 심리적, 육체적 상처를 얻었다. 권지영 씨는 “사 측 직원들은 호시탐탐 우리를 향해 폭언을 했고 직접 여성의 얼굴에 소화기를 뿌렸으며 천막을 부수지 못하게 하면 마구잡이로 끌고 가서 밟았다”며 “너무 끔찍하고 공포스러웠던 날이 아직 생생하다”고 말했다. 아이들도 변했다. 특히 사 측과 경찰의 진압 작전이 언론을 통해 수시로 보여 지면서 아이들은 달라졌다.


조합원 B씨는 “파업 초기에는 ‘아빠, 경찰 아저씨들은 좋은 사람들인데 왜 아빠도 못 만나게 해’라고 묻던 딸아이가 뉴스를 봤는지 나중에는 전화로 ‘경찰은 나빠. 아빠, 이민 가자’고 했다.”고 토로했다. 인권단체연석회의도 “파업 노동자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정신건강의 침해가 매우 심각하다”며 “중학교 3학년인 아이는 아빠의 해고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울기 시작했고 이후 소리를 크게 치거나 악을 쓰면서 우는 등 자주 증오심을 표출했다.”고 말했다. 특히 “퇴근하고 함께 소주를 마시던 동료들을 더 이상 똑바로 볼 수 없게 된” 남편들의 이런 ‘편 가르기’는 그 가족과 아내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같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아내들도 남편들의 처지를 따라 서로를 비난하고, 아이들도 일종의 ‘왕따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 단체의 조사 결과다. 지난 7월 20일 노조 간부 아내 박모(30)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도 이웃의 직원 아내가 남편의 파업을 비난하고 ‘끝나도 감옥 갈지 모른다’는 등의 말을 자주 하면서 상당히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업 노동자의 아내 권지영 씨는 “쌍용차는 파업 기간 한솥밥을 먹던 동료를 적으로 만드는 비열한 노무관리 정책을 폈다.”며 “파업이 끝나도 해고자들은 역시 생계가 막막한데 그 외에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노동사건 최대 구속자ㆍ비해고자 대기발령…그들의 전쟁은 시작이다


게다가 노동관련 단일 사건 사상 최대의 구속자가 발생하면서 그 가족들은 여전히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노사는 ‘최대한 선처’를 부탁하기로 합의했지만, 1997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출범식 때 195명이 구속 기소된 이래 12년 만에 64명이라는 최대 구속자가 나왔다. 구속자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쌍용차는 비해고자이면서 노조 파업에 참여한 94명을 최근 사실상 대기발령으로 볼 수 있는 ‘휴업 발령’을 내렸다.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73명에 대해서는 휴업 종료 기간조차 명시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여전히 남은 과제는 많다. 근본적으로는 쌍용차가 과연 정상적으로 회생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노조의 파업이 끝나고 쌍용차가 생산을 재개했음에도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난 12일 “적정하나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는 등 상황이 더 나빠지면 쌍용차는 파산할 수 있다”며 여전히 파산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미 회사를 떠난 1800여 명과 77일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공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600여 명은 물론이고 어렵게 공장 안으로 돌아가게 된 300여 명의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자신은 살았다고 구사대 역할을 자청한 노동자들 역시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