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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청계산 국립기도원에서 온 편지

 

교회로 편지가 왔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아는데 발신지가 ‘청계산 국립기도원’이다. ‘국립호텔’이야 워낙 많이 들었지만 ‘국립기도원’이라고 하니 조금 헷갈린다. 보낸 사람은 전주에서 오래도록 목회를 하고 통일연대와 진보연대에서 일하며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한상렬 목사다. 경기도 의왕에 있는 ‘서울구치소’에서 온 것이다. 촛불집회와 관련해 진보연대의 대표인 한상렬 목사가 구속된 지 좀 된다. 목사를 잡아 가고 보니 조용하던 동료 목회자들이 들고 일어나 연일 ‘한상렬 목사’를 위한 기도회를 하는 등 벌집을 쑤셔 놓아 이명박 정권은 조금 당황한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서 놀고 동업자인 담임 목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안부를 물을 겸 소식을 보내온 것 같다. 진보연대에 깊이 관여하는 정파의 해악 질에 질린 우리로서는 좋은 사람이라도 그 동네 사람이라면 별로 반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목사라서 그런지 편지 내용이 신앙고백의 수준이다. 마치 신약성서를 가장 먼저 기록한 바울처럼 신앙인(동지)들에게 보낸 서신처럼 제법 묵직한 내용이다.


‘하나 되어야 할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간결하지만 애절하게 담겨 있다. 나와는 신학(철학)이 다르지만 내용은 가슴에 와 닿는다. 가물에 콩 나듯 가는 교회의 목사도 한상렬 목사 못지 않게 지역에서 그 동네 활동에 열성이다. 흔히 말하는 운동권 목사ㆍ신부들 대다수가 비슷한 것 같다. 80년대 말고는 지금까지 민중운동 한다는 목사들은 보지 못했으니까. ‘사랑과 생명’을 말하는 성직자들에게 딱 맞는 것이지만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그 정파가 결정적인 순간에 늘 사고치는 것을 우린 수 없이 봐 왔다. 그런 문제점이 있는 게 현실이라며 문제를 제기하면 그래도 ‘왜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느냐’며 안타까워한다. 거기에다 하나 더 보태어 ‘양보 좀 하면 안 되느냐’고 할 때는 막막하기만 하다. 소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질릴 대로 질린 우리들의 상처를 모르는 일방통행 같아 갑갑하다.


그런 목사와 같이 신앙생활 하다 보면 더러 부딪치곤 해 불편할 때가 간혹 있다. 언젠가 같이 막걸리 한잔 하다 ‘왜 그 동네에서 노느냐’고 처음으로 물었다. 서로가 간섭하지 않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걱정하는 동지들의 마음을 담아 한 말이다. 돌아온 말은 ‘그래도 통일 운동하겠다’기에 “아마 내가 목사나 먹물이라도 통일운동을 할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독일 통일이 가져다 준 문제점을 뛰어 넘은 ‘계급모순’ 극복에 대한 내용을 갖고” 하지 지금의 정파처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더 이상 이야기 하다가는 서로 부딪칠 것 같아 거기에서 끝내고 말았다. 오로지 ‘통일’에 목을 거는 그들을 보면 예전에 하던 ‘닭대가리’란 말이 수시로 떠오르곤 한다. 아무리 시설에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는데 한상렬 목사가 ‘청계산국립기도원’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다 나왔으면 좋겠다. 참, 우리 교회도 이상한 놈이 몇 번이나 왔다가 들켜 도망갔다고 하니 알아서 한 건 만들어 과잉충성 하려는 놈들이 설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