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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아직도 눈물 흘리는 쉰 줄의 늙다리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중년의 늙다리


저는 눈물이 많다는 말을 더러 듣습니다. 사람이 슬픈 걸 보고 슬퍼 할 줄 안다는 것은 복이지요. 남의 아픔을 보고도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을 보고 ‘피눈물도 없다’고 하는데 다행히 제게는 눈물이 있으니 하느님이 귀한 선물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13일 마창대교에서 어린 아들과 70미터 아래 바닥으로 뛰어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몇 일 동안 가슴이 먹먹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겠더군요. 우리 현실이 이렇게 되었는지 원망도 많이 했고요.


▲ 2009년 ‘삽질 대신 일 자리를, 언론악법 철폐’ 전국 자전거 일주를 하면서 인천에서 계양산골프장 반대 싸움을 하는 분들과 만난 자리. ‘환경파괴 현장’을 다니느라 고생한다고 반갑게 맞아 주신 분들.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은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남자다움을 강조하셨지만 마흔을 전후해 조카 둘이 죽었을 때 집안 어른 중 가장 많이 피눈물을 삼키시던 모습이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을이면 문중에서 묘사를 지내는데 갖다 오니 매우 침통하게 술을 드시는 걸 봤습니다. 궂은 일이 있는가 싶어 망설였더니 ‘네 큰 사촌 형이 죽게 생겼다’며 ‘우린 밥은 먹고 사니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에 ‘당연한 일이니 알아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큰 집에 가셔 ‘질부야, 적은 돈이지만 치료비에 쓰라’며 전해 주고 오셨는데,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은 복현동 아제가 가장 많이 주셨다”는 말을 나중에 집안 형님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집에 있는 ‘현금을 다 가져 가셨다’는 어머니 말씀에 ‘이건 너무 하다’고 생각했는데 생명을 살리려는 어른의 넓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제가 부끄럽더군요. 그래서인지 집안의 어지간한 문제는 마지막에 아버지가 ‘이렇게 하자’고 하면 다른 분들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벽면서생 같은 저를 보고 놀라는 분들


그 뿐 아니라 술을 못 끊어 수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방황하는 조카를 붙들고 “너희 아버지처럼 40대에 죽으려 하느냐? 자식들이 불쌍히 않느냐”며 눈물 흘리며 사랑어린 꾸지람도 수시로 하실 정도로 정이 많은 분입니다. 물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셨지만 사랑이 있는 정의라 남들로 부터 차갑다는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저희 백부님은 두 집 살림을 하다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 ‘애비없는 불쌍한 놈들’이라며 조카들을 거두셨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처음 보면 벽면서생 같은 얼굴이라 가방 끈이 긴 먹물인줄 알고 놀라고, 서생의 얼굴이 자본과 권력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 놀라고, 그래서 부드러운 얼굴과 달라 놀라더군요. 다행히 강자와 맞서 싸운다고 좋게 봐 주니 고맙지요.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이 강퍅해져 어지간한 일에는 둔해 지기 마련인데 그럴 때 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울 기회가 주어져 무딘 감성을 회복하게 되더군요. 특히 성평등과 여성학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범생이 모습만 기억하는 친구들은 지금의 저를 보고 정말 놀랍니다. 잘 풀려 전문직에 있거나 공부를 더 해 가방끈이 잔뜩 길어져 있는 줄 아는 친구들이 많더군요. 같은 교회에 다녔던 서로 좋아한 중학교 1년 후배는 ‘선배가 목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기에 ‘세상을 향한 목회를 하는 것 아니냐’며 시원하게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 제가 척박한 대구 지역에서 듣기도 힘든 진보정당의 구성원이라고 하니 평범한 여성이 놀랄 수 밖에요.


뭇 생명의 아픔을 아는 것이 진보정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동운동을 하지 않고 진보정당운동을 한다니 조금 달리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 인간이 언젠가는 의원님이 될 줄 아느냐’는 착각도(?) 조금은 작용하겠지요. 과격하고 쇠파이프 휘두르며 경찰과 맞서 싸우는 왜곡된 모습이 조중동에 의해 각인된지라 결코 무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해마다 봄이면 벌어지는 단체협상에서 이겨야만 살 수 있기에 노동자들은 파업도 불사하건만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의 사업 거들 내는 집단으로 보이지요.


요즘은 친구들과 술자리에 가면 ‘언제 출마하느냐’는 소리를 듣느라 귀가 따갑습니다. 나이 오십에 ‘한 겨울에 농성이나 하지 말고 좋은 길 찾아라’는 말이 고맙지요. 그렇지만 그때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어 가장 정치적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을 선택한 것인데 그것마저 과격해 보이는 가 봅니다. 자연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게 과격하다면 저는 계속 과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파괴에 맞서 ‘나무 위 농성’을 하면서 오히려 눈물이 더 많아 졌습니다.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이름 모를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으니 말이죠. ‘사람만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 된다’며 짐승 몇 마리 죽는 것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자연의 소리를 들은 후 확 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 이젠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못할 것 같습니다. 겨울 골 들머리의 칼바람을 통해 저를 거듭나게 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곱씹으며 뭇 생명들의 아픔을 느끼곤 합니다. 이래저래 눈물이 메마르지 않아 고마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