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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장준하 시신 수습한 동생 백기완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은 의형제다.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만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감옥을 들락거리다 의형제가 되었으니 장준하 선생 유골에 난 타살 흔적을 보는 심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하신 후 지금까지 기일이 되면 고문 후유증으로 불변한 몸을 이끌고 현장을 꼭 찾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남인 장호준 씨가 귀국한 후 유족에게 장 선생의 추모 관련 일을 넘겼다. 두 분은 부산 피난 시절 백 선생은 어렸고 장준하 선생은 한창 젊었을 때 발간자와 독자로 만났다. 그가 처음 본 것은 장준하 선생과 부인이 사상계를 만들어서 손수레 끌고 팔러 다닐 때였다. 해방 후 임시정부 선발대로 백범 김구 .. 더보기
‘야권단일정당 100만 민란’을 주장하는 문성근 님에게 ‘100만 민란’은 권영길의 ‘100만 민중대회’와 흡사 문성근 님이 앞장서서 하는 ‘100만 민란운동’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접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는 문성근 님을 개인적으로 전혀 모릅니다.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를 한 큰 어른’인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이란 것과, ‘연기 잘 하는 배우’라는 정도만 알죠. 물론 우리 영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신 것도 압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자리도 맡지 않고, 오직 연기자의 길로 간 보기 드문 신념이 뚜렷한 분이라 존경도 합니다. ▲ 배우 문성근 씨가 5월 20일 오후 서울 신촌에서 야권후보로 출마한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유세를 펼치고 있다. 지금은 ‘야권 단일정당 100만 민란운동’에 앞장서.. 더보기
문익환을 신학자에서 거리 목회자로 만든 장준하 구약학자인 문익환을 거리 목회자로 만든 친구 장준하 1979년 우연한 기회에 ‘장준하 추모 문집’과 ‘돌베개’라는 장준한 선생의 자서전을 봤습니다. 갓 스물이 된 피라미 청년은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를 당한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는 영원한 앙숙이었습니다. 아니, 박정희의 약점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지라 눈의 가시였죠. 한국전 참전자인 팔순의 우리 아버지도 ‘장준하는 정말 인물이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 1962년 잡지 발행인으로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은 장준하 선생이 귀국 환영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53년 4월 부산 피란 때 나온 창간호 표지. (사진: 한겨레신문).. 더보기
광복절에 연행당한 광복군 장교…영원한 민족주의자 장준하 “광복군 장교였던 내가, 조국광복을 위해 중국 땅 수 천리를 맨발로 헤맨 내가 오늘날 광복이 되었다고 하는 조국에서, 그것도 광복절 날 이런 데로 끌려 다녀야 하겠소?” 1974년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신촌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집으로 가다가 자신을 연행한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에게 장준하 선생이 외친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지사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친일을 일삼던 무리들이 오히려 활개 치며 살아왔던 남한 현대사의 슬픈 풍경이 이 일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가슴 아픕니다. 그 비운의 주인공 장준하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수업 중에 장준하 얘기를 꺼내면 아이들은 무한도전의 정준하를 먼저 떠올린다고 합니다. 대학생들 역시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 더보기
김수환 추기경이 과연 민족의 나침반이었는가? 고인이지만 개인이 아닌 공인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하자. 세상을 떠난 사람 앞에 바로 비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저 역시 그 말에 공감하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더구나 한국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기에 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어 밤을 지새우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성역은 없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글을 쓰며, 제가 지금 처한 특수한 환경 때문에 자료가 빈약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김수환이란 이름은 개인이 아닌 종교지도자이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공인이요 한국천주교 최초의 추기경이란 중책을 맡은 사람이니 일반인들과 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더 냉엄한 평가와 비판을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제 종형 한 분이 서른여덟 젊은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