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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야권단일정당 100만 민란’을 주장하는 문성근 님에게 ‘100만 민란’은 권영길의 ‘100만 민중대회’와 흡사 문성근 님이 앞장서서 하는 ‘100만 민란운동’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접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는 문성근 님을 개인적으로 전혀 모릅니다.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를 한 큰 어른’인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이란 것과, ‘연기 잘 하는 배우’라는 정도만 알죠. 물론 우리 영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신 것도 압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자리도 맡지 않고, 오직 연기자의 길로 간 보기 드문 신념이 뚜렷한 분이라 존경도 합니다. ▲ 배우 문성근 씨가 5월 20일 오후 서울 신촌에서 야권후보로 출마한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유세를 펼치고 있다. 지금은 ‘야권 단일정당 100만 민란운동’에 앞장서.. 더보기
영화배우 문성근의 형 문호근의 고민 두 사람은 고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학창 시절 큰 아들인 호근이 공부도 더 잘 하고 인물도 좋아 아우인 성근은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한 거목인 아버지 때문에 어디가면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라고 해 늘 부담스러웠지요. 이름 난 아버지 때문에 장애물이 많았음은 물론이죠. “문익환 목사님의 큰 아들이고, 영화배우 문성근 씨의 형”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기는 가운데 끼어 불편하더라는 말에 사람들이 한 바탕 웃곤 했답니다. 문호근은 통일과 민주화에 일생을 바친 부친의 유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2001년 5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까운 음악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문호근은 모 국립대에서 .. 더보기
문익환을 신학자에서 거리 목회자로 만든 장준하 구약학자인 문익환을 거리 목회자로 만든 친구 장준하 1979년 우연한 기회에 ‘장준하 추모 문집’과 ‘돌베개’라는 장준한 선생의 자서전을 봤습니다. 갓 스물이 된 피라미 청년은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를 당한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는 영원한 앙숙이었습니다. 아니, 박정희의 약점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지라 눈의 가시였죠. 한국전 참전자인 팔순의 우리 아버지도 ‘장준하는 정말 인물이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 1962년 잡지 발행인으로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은 장준하 선생이 귀국 환영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53년 4월 부산 피란 때 나온 창간호 표지. (사진: 한겨레신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