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대 여섯 철부지에게 ‘사회를 알아야 한다’며 신문사설을 보도록 권하신 전경일 선생님, 쉰이 된 지금까지 세상을 향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에게 사회를 잘 배웠기 때문’이라고 친구들이 말하더군요. 특히 덩치 큰 애가 작은 애를 때렸을 때 ‘덩치 값 못 한다’며 이유는 뒤로 하고 큰 아이를 먼저 꾸지람 하셨죠.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큰 형님이자 오라버니이신 멋쟁이 박삼선 선생님, 어린 나이였지만 몸이 좋지 않거나 장애가 있는 후배들을 배려하도록 유난히 신경을 쓰셨죠. 제가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걸 묵과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던 사춘기 시절에 배운 것입니다.
아들 같은 제자가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걱정해 주시는 이덕순 선생님, 착하기만 하고 모범생이었던 제가 마치 투사로 보여 놀라셨을 줄 압니다. 저는 투사도 못 되고 그리 과격하지도 않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했고, ‘불의를 불의’라 말할 뿐입니다. 어머니 같은 선생님에게 꽃바구니를 드릴 정도로 감각도 있는 부드러운 남자란 걸 잘 아시죠? ^^ 약자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거꾸로 된 세상이 윤희용이 같이 평범한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같이 가야 하는 게 신앙’이듯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 할 뿐입니다. 못난 제가 가는 길이 이 땅에서는 너무 멀고 험난해 보여 걱정하는 사랑하는 벗들이 우려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염려하시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흔히 개혁이나 변혁을 말하면 마치 세상을 갈아엎어 버리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을 ‘제 자리로 갖다 놓는 것’이라고 세계적인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역사와 해석’ 서문에서 밝혔습니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아가 저 같은 허물투성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입니다. 어떤 선생님은 ‘지난 좌파 정권 10년’이라고 하지만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야 말로 빈부 격차를 더 심화 시켰고, 구조 조정이란 이름의 비수를 들이대어 성실하게 일만 해 온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장본인이라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국가가 교육을 책임지는 북서 유럽 정도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공정한 경쟁의 기회’는 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립대학 법인화’를 김대중 정권이 들고 나와 ‘국립대학의 사립화’를 시도해 돈 없는 집 자식들은 대학 구경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상의료는 아니라도 일하다 다친 사람을 치료해 현업에 복귀하도록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노무현 정권은 산업재해보험을 악독하게 만들어 피해자이기도 한 저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덕순 선생님, ‘원수를 사랑하라’고 배운 예수쟁이인 제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 많아 걱정되시죠? 별 것 아닌 인간이 ‘아닌 것을 아니다’고 살다 보니 남은 것이라곤 온 몸에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렇다고 외면하며 살 수 없어 제게 주어진 길을 갈 뿐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할 수 없기에 수 없이 갈등 하면서도 이 길을 갑니다. ‘조금만 비겁하면 행복이 보장’되지만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는 정직’이기에 그 길을 못 가겠더군요. 배운 게 적다고 기 죽지 않고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원할 뿐 누굴 해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가진 자들의 재산을 빼앗자는 게 아니라 ‘같이 먹고 살자’고 할 뿐입니다.
불행히도 부자들이 먼저 자신의 곳간을 연 나라는 단 한 군데도 없고 민중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떠밀려 마지못해 연 게 인류 역사이더군요. 저와 동지들이 가고자 하는 진보정치의 길은 이미 이루어진 나라가 많이 있기에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님을 전경일 선생님은 잘 아실 겁니다. 누구는 저희들을 보고 ‘반대만 한다’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것은 거의 없고 엉터리로 하니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같이 살 길을 찾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희망이 없고 그것은 곧 저희들의 노후조차 불안할 수 밖에 없기에 ‘같이 살자’고 목소리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들이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의무라고 선생님들에게 배웠습니다. 이것이 투쟁이고 이런 저 같은 사람을 투사라고 부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피해를 입은 분들이나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가 지금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고통을 겪고 있는 잊혀 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대충 총을 쏘았을 뿐인데 ‘내가 쏜 총에 누가 죽었을지 모른다’며 29년이 지난 지금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원흉인 전두환ㆍ노태우 일가는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한 광주는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얼마 전 박태준의 딸과 이혼해 어느 탤런트와 재혼한 전두환의 둘째 아들은 30억짜리 호화판 주택으로 이사 갔다고 하더군요.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우기는 전두환의 아들이 이렇게 판을 치는 한 광주학살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은 깊어만 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선생님, 이런 인간들이 있는 현실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부모 된 자로서 죄악이기에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은사님들에게 좋은 말씀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만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다음에 찾아뵙고 선생님들과 지난 시절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09년 5월 18일 제자 윤 희 용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