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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앞산의 동무(同舞)는 누구인가?

 

“운서(韻書)에 이르기를 ‘동무(同舞)는 바로 마주 서서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동무(同儛)’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쓴 백과사전 격인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나오는 것입니다. 이 ‘동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북한에서 “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쓴다고 하여 다까끼 마사오 시절부터 쓰지 못하게 했지요. 말 하나까지 간섭해대었으니 권력 유지에 얼마나 자신이 없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라는 이 글은 신경림 시인의 ‘산동네’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걸음동무’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 곧 ‘동행’을 말합니다. 즉, 같은 뜻을 가지고 가는 동지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걸음동무’ 한 사람만 있다면 참 좋을 일이겠지요. 가뭄의 단비라 내린 비가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워낙 가물어서 가뭄 해갈에는 많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비가 온 후 달비골 앞산터널 현장에는 흙탕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계곡을 타고 저절로 내려가면 이름 모를 생물에 의해 자연스레 정화되건만 인간의 탐욕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앞산에서 신명나게 같이 놀고 춤추던 동무들이 우리들의 놀이터인 앞산을 지키려다 파렴치한 건설자본에 의해 고소를 당해 벌금을 맞게 되었습니다. 용역깡패 동원한 것은 합법이라 괜찮고 자연을 지키는 것은 불법이라 처벌하는 희한한 세상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함께 고생한 동지(동무)들이기에 그들의 아픔을 같이 안고 고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기본 도리지요. 이것이야 말로 원칙이고 최소한의 상식이라고 믿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그리 거창한 게 아니건만 원칙을 말하는 사람을 아주 우습게 아는 우리 사회 풍조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동무(동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기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원칙이 통하는 세상이 되기를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