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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아까운 사람들(2)― 삼성에 있는 후배들

 

삼성이 돈으로 찍은 아까운 후배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거리에는 최루탄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청년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변혁을 갈망하는 많은 청년학생들 치열하게 싸웠다. 그 무렵 당구장에 붙어사는 후배들을 보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며 질책을 한 친구가 있었다. 나 보다 6년 후배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훨씬 앞서 있었다. 좀 안답시고 교만하지도 않았다. 무식한 선배가 ‘어떤 책을 봐야 하느냐’고 물으면 바로 책을 보여 주며 권하기도 했다.



남들과 달리 이 후배는 ‘문건에 매달리지 말고 원론에 충실하라’는 자극을 준 고마운 은인이다. 덕분에 나는 ‘무식한 저 선배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밤 세워 가며 공부하도록 자극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주말이면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를 누비고 다닌 것도 치열하게 살아간 그런 후배들 때문이다. 그런 귀한 인연을 만난 건 결코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 감히 고백한다.


둘 다 삼성에서 밥 법이 하며 살고 있다. 한 후배는 아버지가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계서 돈 안 드는 사관학교에 가려고 했다. 자기 양심에 멀쩡한 사람 고문은 못해 경찰대는 피하고,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사관학교를 택했다. 고3이 그런 판단을 했으니 난 놈이다. 친구와 후배들은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 모두 말렸다. 스카이대 합격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모든 걸 통과했으나 신체검사에서 혈압이 높아 떨어지고 말았다.


가난하고 똘망한 놈들을 싹 쓸어간 삼성 장학금


민감한 시절인 고3에게 불합격이란 통보는 큰 충격이었다. 몇 달을 방황하며 술로 살았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성적은 바로 곤두박질 쳐 복현골도 못 가고 수첩공주의 학교로 갔다. 대학가서 학습을 하는 가 싶더니 ‘형님, 삼성에서 장학금을 줘 받았습니다’기에 학비 보태 줄 형편도 안 되니 ‘공부 잘 하라’고 했다. 삼성의 장학금을 받은 후부터 서서히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집안을 책임져야 할 처지라 모든 걸 접고 공부만 했다. 지금도 만나면 후원금 내 주는 이 후배가 고맙기만 하다.


다만 좋은 친구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삼성재벌의 부속품이 되어 있는 현실이 속 상할 따름이다. 위에서 먼저 거론한 후배는 관악골 사대에 진학했다. 과학 관련 교육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후배를 보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질타를 해 이 친구를 보면 피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다음 날 할 일이 있으면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도 책을 보다 잘 정도라 내가 부끄러웠다.


당구장에 가지 않고 화투짝을 손에 들지 않은 것도 이 후배 덕분이다. 그 시간에 책 한 줄 더 보고, 체력관리 하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였다. 바싹 마른 체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친구가 자취방에 비표를 설치해 두고 다닐 정도라니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집에 가 보면 책장에 책이 가득 차 있었다. 다 손 자욱이 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순간 기가 죽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조용하던 후배가 입만 열면 멈추지 않고 열정을 쏟아내는 이유를 알았다.



삼성으로 보낸 원인 제공은 내가 뱉은 말


1987년 난 후보 단일화를 말 할 때 그 후배는 ‘민중후보여야 한다’며 선배를 부끄럽게 했다. 대학 3학년이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한다며 과외까지 하며 선거자금을 조달하곤 했다. 그 후배의 대학생활은 그렇게 치열해 정말 많은 걸 보고 배웠다. 몸이 좋지 않아 병역 면제를 받자 ‘그 시간을 활용하자’며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박태호(이진경)를 비롯한 사회ㆍ경제학 전공자들과 학습할 정도로 내공이 대단했다.


더 놀란 것은 이미 그 때 ‘운동권 사투리는 오만의 극치’라며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다. 고가의 비밀과외가 있던 시절이라 돈 없는 촌놈이 한 두 개만 해도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음에도 ‘연구와 학습에 지장있다’며 몇 개월 하다 그만 둘 정도였다. 그런 후배가 박사과정에 진학해 ‘삼성장학금’을 받으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사를 했으면 뛰어난 교육운동의 활동가가 되었을 친구인데 ‘이왕 시작한 공부니 박사학위는 받는 게 어떠냐’고 무심코 던진 게 화근이었다.


그 말 한 마디가 사람의 운명을 바뀌어 놓고 말았으니 원인제공자인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재벌이 한국사회를 좌지우지 할 정도가 아니라 ‘시작한 공부는 마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한 말인데..... 공부는 해야 되고 돈이 없으니 삼성재벌이 준다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는 삼성이 지금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니 주는 돈 그냥 받은 것이다.


똑똑한 놈들은 다 가고 멍청한 선배는 남아 있고


지금 같으면 ‘다른 건 몰라도 삼성 돈은 받지 말라’고 할 텐데 내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사를 했으면 뛰어난 활동가가 되었을 친구인데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으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위 받고 가면 과장인데 교사 월급과는 비교가 안 되니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사람이 변해갔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나 한 동안 전화받는 것 자체를 거북해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낸지 오래되었다. 17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에 도수 높은 안경,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 후배들을 아끼던 그 친구야 말로 선생 체질인데 길이 바뀌면서 모든 게 달라져 ‘안타까운 사람 버렸다’는 생각을 수 없이 한다. 역시 자본의 힘은 막강해 사람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선배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후배를 보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삼성전자에서 구조조정이란 말이 나올 때 마다 안절부절 하며 살아가는 그 친구가 너무 아깝다. 교단에서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아야 할 후배가 삼성재벌의 부속품이 되어 있어 정말 속이 상한다. 그렇게 똑 소리 나던 관악골 서생은 재벌회사에 다니고, 멍청한 선배가 진보정당에 다리 걸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커 가는 자식들 이야기라도 하며 한잔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