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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잔인한 계절 4월에 감히 희망을 말하면서

 

1등만 기억하는 야박한 사회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고 합니다. 4월에 눈이 내리고, 목련이 폈다가 추운 날씨 때문에 얼어붙기도 합니다. ‘소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 천문학자들의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4월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결코 접을 수 없습니다. 하루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사회에서 고소영ㆍ장동건의 결혼을 화제로 떠 올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우리네 현실입니다.



‘193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 이후 최고의 공황’이라며 ‘대비책을 세우라’고 경제학자들이 부르짖건만 오만한 권력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난 상관없다’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심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등이 있는 것은 2~3등을 비롯한 꼴찌가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1등만 기억하려 합니다. 올림픽에 나가도 금메달을 따야 되지 동메달은 ‘수고했다’고 박수조차 쳐 주지 않는 참으로 야박한 사회입니다.


잔인한 계절 4월에 희망을 말하면서


어쩌다 이렇게 각박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수술도 몇 개월을 기다리면서 소문난 의사를 찾으려고만 합니다. 새치기 하려고 온갖 청탁을 해 사람을 난처하게도 만듭니다. 3~4등하는 의사들도 수술 잘 하는데 언론에 알려진 사람만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자들이 만든 소설’이라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수술 많이 하니 실력이 늘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름난 자는 교만에 가득 차 목이 잔뜩 굳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기상이변과 경제공황은 인간의 탐욕이 낳은 필연적인 산물인 것 같습니다. 욕심을 조금만 줄이고 가난하고 힘든 이웃을 돌보는 사회구조만 만든다면, 지금처럼 하루 35명이나 자살하는 비극은 없을 텐데 정치인은 대비책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 10년 민주정부도 그냥 방치했습니다. 산재환자의 강제 종결과 자살은 노무현 정권 때 급격히 늘어나 ‘민주주의자들이 약자를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일하다 다친 것도 서러운데 꼴 난 치료조차 해 주지 않으려는 파렴치함에 치를 떨지 않는다면 이상하지요. 그렇다고 종교가 약자들과 함께 하는 것도 아닙니다. 토건공화국의 종교집단 답게 콘크리트에 돈을 퍼부어 대기만 할 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이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산골에도 봄은 왔습니다. 날씨가 제 아무리 변덕을 부려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음은 자연의 순리지요. 그래서 우린 ‘잔인한 계절 4월’에 감히 희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